아빠, 미안해.

아버지가 인제 많이 늙으셨는지, 기댈 곳을 찾으시는 것 같다.

이놈의 인간말종도 딴에 아들놈이라고, 나이 드시니까 많이 찾는다.
매일 전화 통화라도 한 번씩 해야 마음이 놓이시는지,
내가 전화를 안하면 당신이라도 꼭 전화를 하신다.

행여라도, 섭섭한 말을 한 마디 하거나 틱틱거리면,
그게 못내 섭섭하신가보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그런 날은 꼭 밤에 안주무시고 훌쩍이거나 한숨만 푹푹 쉬신댄다.

참....울 아빠, 늙어도 너무 늙었다.
광안리와 남포동을 주름잡던 조폭 아저씨는 어디가고,
동네 도둑은 다 잡아내던 무서운 아저씨는 어디가고,
이제 나이 들고 힘없는 늙은이가 되어서,
아들놈 말 한 마디에 울기도 하고, 기운을 내기도 한다.

그런 영감이, 손주가 보고싶어 죽겠나보다.
벌써부터 결혼이야기가 오간다.
졸업하면 바로 결혼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라고 성화다.
바로 결혼해서 손주 보게 해달라신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다짐을 받아내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결혼은 하지 않을 거고, 당연히 애도 낳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을 말해도 믿으려 들지 않는다.

지금의 애인님이 아니라, 예전에 다른 사람을 사귈 때, 나는 분가해서 따로 지내지 않고
부모님과 한 집에 지냈었는데, 그 때도 가끔 애인을 집으로 데려갔었다.
친구라고 소개하고 밥도 자주 먹고 잠도 자주 자고 갔는데,
어느 날엔가, 섹스 후의 뒤처리를 미처 깨끗하게 하지 않고 외출을 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런 말도 없던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무척 화가 나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물까지 살짝 글썽이면서 따져 물었다.
손에는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휴지조각이 들려있었다.
그녀석과 지난 밤에 무슨 짓을 한거냐. 이건 뭐냐.
너무 당황하고 놀란 나는,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냥 그런거야. 친구야.라고만 더듬거리면 말했고,
구경만 하시던 어머니가 말리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그 이후에, 가족 중 누구도 그 일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한 적이 없고,
어머니는 지금도 나의 옛애인에 대해 안부를 묻곤 하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까.
어떻게 결론 지었을까.

고등학교때, 수많은 게이소식지와 게이관련 서적을 방에 깔고 다녀도
아무런 말도 없이 깨끗하게 책상 정리를 해주시던 어머니다.

사실, 두 분 다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아빠, 엄마.
나한테 기대지 마.
나, 엄마 아빠한테 최대한 잘할께.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잘 할께. 하지만, 드릴 수 없는 것도 있어.
며느리도 보고, 손주도 안아보는 평범한 행복을, 진짜 주고 싶은데.
진짜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내 마음도 아파.
미안해, 아빠. 정말.


덧.
몇 년을 잘 알고 지내던 레즈비언 누이가 시집을 간다.
날짜를 알려주려고 전화를 해서는 예전과 같이 밝게 웃는다.
힘든 내색 하나도 하지 않고 밝게 웃는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자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결혼하는 만큼, 짝에게도 잘해주겠지.
그런데, 누난 행복할 수 있어? 그렇게.
by Lucifer | 2005/04/07 01:20 | what's up? | 트랙백(1) | 덧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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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반달, 습작. at 2005/04/09 09:56

제목 : 서른 두 살 '천연기념물'의 결혼
어떻게 생각해? 그 남자 땡 잡았네 왜? 서른 둘, 노처녀랑 결혼하는데 그처녀가 왠걸 남자랑 잔 적이 한 번도 없다네, 횡재한 거지. 그럼 난 '천연기념물'인거야? 아마도. 사람들은 섹스를 성기와 성기의 요철 결합으로 간주하니깐. 그래도 테크닉면에서는 여느 애들 못지 않을 껄? 어떤 애들? 일반적인 서른 두 살 '소녀'들. 하긴. 그런데 남자랑 할 때 흥분이 되겠어? 어쩔꺼야? 넌 군대에서 젖꼭지 안 빨려 봤어? 거기까지. 충분히 이해됐어. 빨려봤구나. 좋았어? 살짝 닥치시고. 하여튼 누나가 결혼해서 누나한테 '생물학적인' 자......more

Commented by at 2005/04/07 01:34
아 그리고 와락 안아주고 싶어
니가 싫대도 -.-

(하지만 그림이 영 안 나오네 쩝)
Commented at 2005/04/07 01: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kat at 2005/04/07 06:13
문득 문득 잊고는 살지만, 죽을때까지 이 짐에서 자유로울수 없죠. 마음 아픈 루시님을 압니다. 그리고 저도 문득 문득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해결책은 없죠. 하지만 매일 매시간 이 문제로 힘들지 않으니 사나 봅니다.
Commented at 2005/04/07 06:1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별바람늑대 at 2005/04/07 07:29
에휴...... 뭐라.. 할말이 참.. 없네요....
토닥토닥....
Commented by happyalo at 2005/04/07 07:49
아침에 담배 사다달라는 아버지께 좀 매정하게 굴었어요.
폐가 안 좋아서 중환자실까지 가셨었고, 요샌 숨이 가빠 계단도 잘 오르내리시지 못하면서 담배를 사다 달라시는데...
이럴 땐 정말 너무 어려워요. 마음 편하시라고 사다 드려야 하는 건가, 몸을 생각할 때 안 사다 드리는 게 맞는 건가. 후...
부모, 자식 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쉽지 않은 거 같습니다...
Commented by sebai at 2005/04/07 08:52
부모자식만큼 끈끈한 관계도 없지만...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자식된 입장은..
참 슬픈 것 같습니다.
섣불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그저 힘내시라는 말 밖에는..
Commented by AMAGIN at 2005/04/07 09:04
그래도, 역시 루시님이 행복하게,즐겁게 잘 지내는 것이 가장 기쁘실 겁니다. 그러니까, 힘내세요...
Commented at 2005/04/07 10:1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04/07 10:2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04/07 10:5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ba꾹 at 2005/04/07 12:19
훌쩍~
Commented by 이명 at 2005/04/07 12:44
음, 괴로워요. 이 생각 저 생각에...
Commented at 2005/04/07 13: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Lucifer at 2005/04/07 14:13
깍누이/ 왠일로 욕지꺼리 대신 안아주겠다는 말을 다하셔!? 쳇~ 그리고 진짜 얼굴 안본지 너무 오래야;; 한 2주는 넘은듯; 점심이나 같이 한끼하자고; 아참..그리고 위에 있던 덧글은 내가 삭제했어, 미안. 개인정보가 있길래...으하하 ^^

비공개님/ 네, 같은 처지에 있는 만큼 비슷한 일도 많이 겪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맞습니다. 일단 제가 행복할 수 있어야죠.

skat님/ 다른 방법으로라도 잘해드리는 수밖에 없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예요.

비공개님/ 글쎄요^^;; 제가 들르는 곳이 아니라 잘 모르겠어요. 들러봐야겠습니다. ^^

별바람늑대님/ 자기 왔엉?~ 아앙~~ ♡

happyalo님/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네요^^;; 저는 약간 독한 타입이라, 절대 안사다드렸을 겁니다. 박하사탕따위를 사드렸을 것 같네요^^;(아 이게 중심이 아닌데^^;) 제가 행복하려면, 제 개인적인 영역은 물론이고, 가족과 맞물려 있는 부분도 행복해야할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어려운가봅니다.
Commented by Lucifer at 2005/04/07 14:21
sebai님/ 아들놈이 아직 철이 안들어서 손주같이 여기셔도 될텐데. 아들이자 손주를 해볼까요.....할부지~ 용돈쭤어~ (맞을래나;;;)

AMAGIN님/ 네, 행복하게 즐겁게 잘 지낼겁니다. 사실 그게 제 삶의 목표 ^^;

비공개님/ 어느 집이나 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거로군요. 관계,라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까운 만큼 더 조심해야하겠죠. 힘내세요 ^^

비공개님/ 네, 저도 결혼식장에 가서 울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밝게 웃어줄텐데. 이 결혼은 무효야! 여보! 한댔더니...죽인댑니다. 후훗.

비공개님/ 네~ 행복할 겁니다~ 비공개님도(이렇게 말하니 이상 ^^;) 꼭 행복하세요.

Commented by Lucifer at 2005/04/07 14:21
dba꾹님/ 아이구~ 뚝~ ^^;; 전 이런 글 쓰면서도 별로 많이 안슬퍼하는걸요^^;;;; 쓸때만 흑흑 막 난리굿...울고 불고...근데 한 판 글이라도 쓰고나면 언제그랬냐는 듯 멀쩡해요;; 아- 난 변태일지도 ㅠ.ㅠ

이명님/ 괴로운 일이 한 두가지겠습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 생지랄이라지 않습니까, 흑. 헤헤~ 힘내세요~

비공개님/ 그만큼 힘이 되는 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되고 성의가 되는지 모르실거예요 ^^ 고마워요.
Commented by nipple at 2005/04/07 16:18
왠지 눈물이 핑 도네요..
Commented at 2005/04/07 16: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offside at 2005/04/07 17:30
정말..;;;
이런 상황에 처한 가련人 한국(!)에 매우 많음(에 위안 받으시..;;;)
이럴 땐 정말 가임능력 만빵의 형제 많은 사람이 최고! (Lucifer님은 외동이세요?;;)
Commented by 은사자 at 2005/04/07 21:56
그래 루시퍼 우리 다른방법으로 잘하자..
어찌보면 당연한행복못드니리까 더 부모님이 측은하고 그래..
결혼하고 아가앵겨드려도 효자만있는건 아닌거같더라
평소에 꾸준히 신경써드리자!!
Commented at 2005/04/07 22:4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Lucifer at 2005/04/08 02:14
nipple님/ 얼레리 꼴레리~ 울보래요~ ^^ 사실 제가 울보지요 ^^

비공개님/ 고맙습니다. ^^ 네, 제 웃음을 선물해 드리는 게 제일 큰 선물이겠습니다.

offside님/ 외동입니다. 흑. 위로 시집간 누이들이 둘 있습니다. 그간, 누이들이 외손주래도 안겨드려서 그나마 덜 보채시는 것 같습니다^^

은사자님/ 옹냐~ 그카자. 니나 내나 아빠 좀 고마 미워하고, 잘해 드리자. 따지보믄, 나는 부모님이랑 같은 집에 같이 살 날도 앞으로 벨루 읍다.

비공개님/ 아, 비공개님(역시 이상하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도 그런 -_-+ 몰랐습니다. 부모님이 눈치 채셨다 싶을 때는 얼른 부정의 근거를;;; 하핫; 힘내요.
Commented by Nariel at 2005/04/08 02:53
음.. 새벽에 들어와 이 글을 읽고.. 마음이 좀 싸-하네요.
루시님 마음이 많이 아프지 않길.. 바래요.
Commented at 2005/04/08 12:0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Lucifer at 2005/04/08 14:34
Nariel님/ 저는 괜찮습니다 ^^ 워낙에 기분이 자주 변해서 큰일입니다. 헤헷. ^^ 고맙워요.

비공개님/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부모님도 알고 계시는 분인가봐요? 행복하셔야죠, 암요. 행복한 게 최곱니다.
Commented by 김군 at 2005/04/08 15:02
음... 언젠가 다가올 고민을 미리 보는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힘내!
Commented at 2005/04/08 17: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페코냥 at 2005/04/08 22:00
항상 마음이 아픈건..가족이 있긴 때문이고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것도 가족이 있기때문이기도 하죠..힘내세요..이해받지 못할 상황인거 알지만...님을 위해 웃어주고 울어주는 저같은 친구가 있자나요..
Commented by 반달 at 2005/04/09 09:55
응? 마지막에 언급한 분이 같은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네요. 저도 얼마전 레즈비언 누이 한분을 시집 보낸 경험이 있어서리..
Commented by Lucifer at 2005/04/11 12:24
김군님/ 남일이 아니지, 암.

비공개님/ 반갑습니다 ^^ 직접 가서 비밀글 달게요 ^^늦게 대답드려서 죄송합니다.

페코냥님/ 꺄아~ 친구당~~~ 고마워요 ^^ 헤헤헤헤 가족이 있어서 그래도 너무 다행이고 좋은걸요.

반달님/ 아, 같은 분은 아니실 듯 해요. ^^ 아직 결혼식도 안올렸구 ^^ 가슴아픈 일이죠? 저도 걱정이예요. 반갑습니다 ^^
Commented by Lucifer at 2005/04/11 12:30
비밀글님/ 성정체성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기는 어려운 성질의 것이라고 봅니다. 그 분이 만약 스스로의 정체성을 그렇게 느끼셨다면, 일단 부정부터 하기에 앞서서, 차분히 따져보기를 권해주시면 좋겠네요. 성이라는 것이 워낙에 예민하잖아요? ^^ 그래서 암만 어떤 충격이 왔다고 한들, 자기가 싫은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물론 힘들고 외로운 삶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은 삶입니다만, 확실히 그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면 응원해주세요. 제 생각에는 아마 그 상대여자분이 많은 위안이 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바이섹슈얼 일 수도 있는 거겠죠. 저도 미숙한 녀석이라 제대로 된 답을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
Commented by Courtney at 2005/04/11 15:07
에잇 또 울리시고 그래요, 왜....
그래도 살아가야죠. 어떻게든. 잘 살와봐요. 우리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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